탄소중립강좌(4)-“탄소중립의 시대, 정작 파리협정(Paris Agreement)엔 그 단어가 없다”

지난 강좌에서 우리는 ‘탄소중립(Carbon Neutrality)’과 ‘넷제로(Net Zero)’ 그리고 ‘기후중립(Climate Neutrality)’의 차이를 정리하며 개념을 바로 세워보았다. 이제는 정부 정책도, 기업의 ESG 보고서도, 국제회의 합의문도 모두 이 개념들을 중심에 둔다. 그런데 정작 전 세계 기후체계의 기준이 되는 파리협정에는 이 익숙한 단어들이 보이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국제협정에 왜 핵심 개념들이 빠져 있을까. 의외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 질문의 답은 약 30여년 전의 교토의정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가 남긴 교훈

 

1997년에 채택된 교토의정서는 선진국에 법적 감축의무를 부과했고, 목표는 감축수치로 고정했으며, 감축 방식도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그러나 그 경직성은 곧바로 정치적 부담이 되어 돌아왔다. 미국은 산업 경쟁력 저하를 이유로 비준을 거부했고, 일본과 러시아는 2차 공약기간(2013~2020)에 참여하지 않았다. 교토체제는 강한 규범이 오히려 참여를 줄이는 역설을 드러냈다. 국제사회는 이후 이 실패를 뼈아프게 기억하게 되었다.

 

■ 파리협정의 전략, “참여를 먼저 확보하자”

 

2015년 파리협정 협상장은 “교토의정서의 실패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강했다. 협상가들은 이 교훈을 바탕으로 더 많은 나라의 참여를 끌어내는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1) 지나치게 구체적인 표현은 피하자.

 

탄소중립이나 넷제로는 직관적으로 쉬운 개념 같지만 국제법에서는 복잡한 해석을 요구한다.

어떤 온실가스를 포함할지, 상쇄를 감축으로 볼지 등 국가마다 판단이 다르다. 이런 용어를 협정문에 넣으면 해석 충돌이 생기기 쉽다. 교토체제가 바로 그러한 규범적 경직성 때문에 흔들렸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2) 감축목표는 외부가 아닌, 각국이 스스로 정하게 하자 — NDC(국가결정기여)의 탄생

 

파리협정이 도입한 NDC(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는 감축 목표를 외부가 부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각국이 스스로 설정하고 이행을 책임지는 체제로 전환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각국이 자율적으로 만든 목표가 더 높은 수용성과 이행 가능성을 보인다는 점은 국제사회가 교토체제를 통해 얻은 중요한 학습이었다.

바로 이 ‘자발성’ 중심의 설계 원리 때문에 파리협정은 처음부터 ‘탄소중립’이나 ‘기후중립’과 같은 단일한 목표를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웠다. 국가별 경제규모, 감축역량, 기술수준이 다른 상황에서 단일목표를 요구할 경우, 파리협정이 중시한 보편적 참여 원칙과 충돌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3) 특정 기체 중심 용어보다 모든 온실가스를 포괄하자

 

‘탄소중립’이라는 표현은 주로 이산화탄소 감축에 초점을 맞춘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파리협정이 다루는 감축 대상은 이산화탄소만이 아니라 메탄, 아산화질소, 불소계 가스까지 포함하는 모든 온실가스이다. 이 때문에 파리협정은 처음부터 ‘탄소중립’ 같은 용어를 채택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비이산화탄소(NON-CO₂) 온실가스인 메탄이나 불소계 가스의 비중이 큰 국가들에게는, 탄소중심 용어가 자국의 배출 구조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개념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선택된 표현, “온실가스 배출과 흡수의 균형”

 

파리협정 제4조 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온실가스 배출과 흡수의 균형을 달성한다.(achieve a balance between anthropogenic emissions and removals…)”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균형(balance)’이다. 이 표현은 각국의 경제 상황·감축 경로 등이 서로 다르다는 현실을 반영하여 여러 방식의 감축 조합을 허용하는 유연성을 담고 있다. “균형”이라는 말 자체가 특정 기체나 특정 수단을 지목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마다 이산화탄소, 메탄, 불소계가스 등 자국의 배출 구조에 맞는 방식으로 전체 온실가스를 조정하도록 여지를 열어 둔 것이다. 또한 ‘넷제로’처럼 특정 수치를 전제로 하거나, ‘탄소중립’처럼 이산화탄소 중심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는 용어에 비해 해석의 폭이 넓어 국가 간 이견이 발생할 위험도 자연스럽게 낮았다.

 

■ 이후 탄소중립·넷제로는 이렇게 국제표준이 되었다

 

파리협정이 ‘온실가스 배출과 흡수의 균형’이라는 큰 방향을 제시하자, 그다음 단계는 이 원칙을 얼마나, 언제까지 달성해야 하는지를 과학적으로 규정하는 일이었다. 이 역할을 맡은 것이 2018년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의 1.5℃ 특별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로 억제하려면 2050년경 전 세계가 넷제로에 도달해야 한다고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

 

이 과학적 기준이 나오자 각국은 이를 바탕으로 2050 탄소중립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고, 기업들도 넷제로 목표를 공식 선언하며 동참했다. 결국 파리협정이 방향을 잡았고, 과학이 목표치를 정했으며, 정책과 시장이 이를 실행하게 된 것이다.

 

 

■ 마무리

 

파리협정에 ‘탄소중립’이라는 용어가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종종 협정의 의도에 대한 오해를 낳기도 한다. 일부는 파리협정이 탄소중립 또는 넷제로를 제도적 목표로 설정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협정문 표현이 선택된 역사적·외교적 맥락을 간과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파리협정은 교토의정서가 가진 경직적 규범 구조가 국가 참여를 약화시켰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전 지구적 참여 확대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 설계된 체제다.

 

결국 파리협정의 용어 선택은 목표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 합의를 극대화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된 조정의 산물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