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기후변화

  • 탄소중립강좌(8)-‘킬링곡선’이 주는 시사점

    탄소중립강좌(8)-‘킬링곡선’이 주는 시사점

    기후변화 대응 논의… 반드시 견고한 관측 데이터 위에 서야

    이미지 제공/ 탄소중립정책, 지구 시스템 5개 권역의 상호작용.
    이미지 제공/ 탄소중립정책, 지구 시스템 5개 권역의 상호작용.

    오늘 강좌의 주제는 킬링곡선에 관한 것이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CO₂) 농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낸 그래프, 이른바 킬링곡선(Keeling Curve)은 현대 기후과학을 상징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지표다. 이 곡선은 복잡한 기후모형이나 가설이 아니라 대기 중 CO₂ 농도라는 단일 지표를 같은 방식으로 오랫동안 측정해 쌓아온 관측 결과다.

    기후모형과 가설이 기후 시스템을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여러 가정과 해석에 의존하는 반면, 킬링곡선은 같은 방식으로 오랫동안 축적된 관측 자료에 기반한다. 이 곡선은 기후변화를 가능성이나 추론이 아니라, 이미 관측으로 확인된 변화로 보여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킬링곡선은 기후변화 논쟁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반박하기 어려운 과학적 증거로 기능해 왔다.

    킬링곡선의 관측은 1958년, 미국의 지구화학자 찰스 데이비드 킬링(Charles David Keeling, 1928–2005)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하와이의 마우나 로아 관측소(Mauna Loa Observatory)에서 대기 중 CO₂의 배경 농도(Background Concentration)를 연속적으로 측정하였다.

    마우나 로아 관측소는 해발 고도가 높고 태평양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 인근 도시나 산업 활동에서 발생하는 배출가스의 직접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또한 이 지역은 공기가 한쪽에 머물지 않고 순환해 대기 중 공기가 고르게 섞이는 환경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마우나 로아에서 관측되는 CO₂ 농도는 지역적 배출의 흔적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축적되는 CO₂ 변화의 방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마우나로아의 킬링곡선.(그림=정복영 교수)
    ▲마우나로아의 킬링곡선.(그림=정복영 교수)

    위 그래프가 킬링곡선이다. 이 곡선은 CO₂ 농도가 해마다 계절에 따라 오르내리면서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기적 변동과 장기적 추세가 시사하는 바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킬링곡선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잠시 오르내림이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후변화가 일시적 변동이나 자연 주기의 산물이 아니라, 화석연료 연소와 산림 파괴 등 인간 활동이 누적되어 나타난 구조적 변화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시 말해, 킬링곡선의 지속적인 상승은 “기후는 원래 변하며 인간의 영향은 분명하지 않다”는 주장을 사실상 무력화한다.

    둘째로 주목할 점은 뚜렷한 계절적 변동 패턴이다. 매년 봄을 전후해, 겨울 동안 식물의 활동이 줄어들면서 대기 중에 축적된 CO₂가 최고점에 이른다. 이후 여름이 되면 북반구에 넓게 분포한 식생이 광합성을 활발히 수행하며 CO₂를 흡수하고, 그 결과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일시적인 감소 국면에 들어선다. 이처럼 톱니 모양의 계절적 변동 패턴은 자연의 흡수 능력이 고정된 용량과 리듬을 가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계절에 따라 반복되는 흡수와 방출은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만 작동하며, 인간 활동으로 배출되는 CO₂의 증가 속도와 규모에는 스스로 대응하지 못한다. 따라서 킬링곡선의 계절적 톱니 패턴은 “자연이 알아서 흡수할 것”이라는 기대가 과학적으로 근거가 약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킬링곡선에서 배워야 할 세 번째 내용은 과학적 태도다. 킬링곡선은 단발성 측정의 수치가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비와 방법을 사용해 중단 없이 이어진 관측위에서 구축되었다. 킬링곡선에 나타나는 톱니 모양의 계절 변동과, 그 위에 겹쳐진 꾸준한 상승선은 이러한 장기적·연속적 측정이 있었기에 비로소 드러난 결과다. 다시 말해, 킬링곡선의 과학적 힘은 개별 수치의 크기보다도, 측정이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나온다.

    사실 이러한 연속 관측은 자연스럽게 유지된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선택과 끈질긴 노력의 산물이었다. 찰스 데이비드 킬링이 시작한 이 관측은 그의 사후에도 중단되지 않은 채, 현재는 아들인 랄프 킬링이 중심이 되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연구비삭감 등으로 여러 차례 관측중단의 위기를 겪었지만, 킬링 부자는 이 측정을 단기 성과를 내는 연구가 아니라 시간이 쌓일수록 의미를 갖는 기록으로 보았다. 그 결과 킬링곡선은 단순한 그래프를 넘어, 오늘날 기후변화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과학적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한편 기후변화에 대한 부정론은 미국 트럼프행정부의 재집권과 맞물러 다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새로운 과학적 반증이 나타나서가 아니라 관측 결과를 둘러싼 사회·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킬링곡선과 같은 장기 관측 자료는 방법론적 일관성과 축적된 데이터의 양 때문에 과학적으로 반박하기가 어렵다. 그런 연유로 논쟁의 초점은 관측 결과 그 자체보다는 관측을 둘러싼 제도적·해석적 영역으로 이동해 왔다.

    최근의 기후변화 부정론은 과거처럼 “CO₂는 늘지 않는다”거나 “기후는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간접적인 형태, 예를 들면 연구비 삭감이나 장기 관측 프로그램의 중단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불편한 결과를 반박하기보다는, 그 결과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도록 만드는 전략에 가깝다.

    기후변화 대응을 둘러싼 논쟁은 치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논의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견고한 관측 데이터 위에 서야 한다. 킬링곡선이 보여준 것은, 하나의 지표를 같은 방식으로 꾸준히 기록해 온 관측의 힘이 인류의 인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였다. 이제 탄소중립은 선언이나 당위의 영역을 넘어, 무엇을 얼마나 줄였는지를 정확히 측정하고 검증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연속적인 관측만이 불확실한 탄소중립의 여정에서 우리가 끝까지 의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나침반이다.

     


    출처: https://www.co2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9

  • 탄소중립강좌(7)-화석연로 대체재 ‘바이오이코노미’ 논쟁

    탄소중립강좌(7)-화석연로 대체재 ‘바이오이코노미’ 논쟁

    바이오이코노미, 화석연료 전환과정서 정교하게 관리할 핵심변수

    에너지 이미지.(출처=pexels)

    우리는 오랫동안 에너지의 출처와 한계를 묻지 않았다. 전기를 켜면 불이 들어왔고, 자동차에 연료를 넣으면 달렸다. 에너지가 어디에서 왔는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는 적은 양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낼 수 있고, 비용 부담이 적으며, 필요할 때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자본주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에너지원으로 작동해 왔다. 국가는 이 에너지를 전제로 산업과 경제를 설계했고, 사회는 그 질서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에너지 질서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화석연료 사용이 누적되면서 기후변화라는 형태로 한계가 드러났고, 이는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전제를 흔들었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성장만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화석연료에 의존해온 방식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이제 관심은 화석연료 이후의 사회를 지탱할 에너지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강의를 하다 보면 자주 마주치게 되는데, 오늘의 강좌도 그 연장선에 있다.


    바이오이코노미(bioeconomy)의 등장

    화석연료 이후의 에너지 체계를 둘러싼 논의가 추상적 구호를 넘어 구체적인 해법을 요구받기 시작하면서, 이미 우리 주변에 존재하던 자들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농업·임업·페기물 등 생물자원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바이오에너지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현실적인 선택지로 부상했고, 이후 그 논의는 경제 구조 전반을 포괄하는 바이오이코노미로 확장되었다.

    이 접근이 주목받은 이유는 직관적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식물은 성장 과정에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그 탄소는 생물체 안에 저장된다. 그렇다면 그 자원을 다시 에너지나 소재로 활용하는 것은 화석연료처럼 새로운 탄소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생물권 안에서 순환하던 탄소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존 탄소의 활용’이라는 인식은 바이오에너지를 탄소중립 시대의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실제로 벌어진 바이오이코노미 논쟁

    바이오이코노미를 둘러싼 논쟁은 단번에 제기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심화되어 왔다. 2000년대 초반, 논쟁의 초점은 식량이었다. 옥수수와 사탕수수, 유채와 같은 작물을 연료로 사용하는 1세대 바이오연료가 확산되면서, 식량 가격 상승과 토지 이용 변화 문제가 제기됐다. 이른바 “식량이냐 vs 에너지냐” 논쟁이다. 이 논쟁은 결국 정책으로 반영되어, 유럽연합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식량 기반 바이오연료의 비중을 제한하고, 폐기물과 부산물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바이오이코노미 논쟁의 초점은 산림으로 이동했다. 나무를 베어 태우는 산림바이오매스가 과연 재생에너지로 인정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 것다. 이 과정에서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개념이 Carbon Payback Time, 즉 탄소 회수 시간이다. 숲을 베어 에너지로 사용하면 탄소는 즉시 대기 중으로 배출된다. 그러나 그 탄소가 다시 숲에 의해 흡수되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릴 수 있다. 이 시간적 간극을 탄소 회수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기후위기가 요구하는 시간표다. 탄소중립은 언젠가 균형을 맞추자는 장기적 약속이 아니라, 향후 수십 년 안에 배출을 빠르게 줄여야 한다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논쟁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쟁점은 “바이오에너지를 쓸 것인가 vs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바이오자원을, 어떤 용도로, 어떤 순서로 사용할 것인가”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원칙이 바로 Cascade use, 즉 단게적 이용이다. ‘캐스케이드(cascade)’ 라는 말은 원래 폭포를 뜻한다. 물이 한 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을 거치며 아래로 흐르듯, 바이오이코노미에서 이 개념은 생물자원을 가치가 높은 용도에서 낮은 용도로 순차적으로 활용하자는 원칙을 의미한다. 유럽은 바이오자원을 에너지로 태우는 것을 ‘가장 마지막 선택지로’ 간주한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물질로 사용해 탄소를 저장하고, 더 이상 활용이 어려워졌을 때에만 에너지로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방향이다.


    바이오이코노미의 가능성과 한계

    바이오이코노미의 진짜 역할은 화석연료의 ‘전면 대체’가 아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지금은 한계가 있지만, 기술이 더 발전하면 바이오이코노미가 화석연료를 대신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기대에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전제가 있다. 바이오이코노미의 역할을 제약하는 요인이 단지 기술의 미성숙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이오자원은 반드시 토지와 물, 생태계를 필요로 하고, 광합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에너지의 양에는 물리적인 상한이 존재한다. 아무리 공정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단위 면적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바이오에너지의 양을 무한히 늘릴 수는 없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경쟁의 구조다. 바이오자원은 에너지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식량과 생태계 보전, 토양과 수자원 관리와도 맞닿아 있다. 에너지 수요가 커질수록 이러한 영역과의 긴장은 피할 수 없다. 이런 조건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과도기적 문제’가 아니라, 바이오이코노미가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구조적 제약이다.

    이런 한계를 외면한 채 바이오에너지를 화석연료의 ‘완전한 대체재’나 ‘만능 해법’으로 포장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이오이코노미의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이오이코노미는 전기화가 어려운 영역, 이를테면 항공과 해운 연료, 고온이 필요한 산업공정, 화학 연료와 같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농업 부산물과 폐기물을 자원으로 전환함으로써 순환경제의 마지막 고리 기능도 수행한다.

    바이오이코노미를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그 방향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바이오이코노미의 채택 여부가 아니라, 활용의 범위와 조건, 그리고 우선순위다. 탄소중립 시대의 에너지 전환은 하나의 새로운 연료를 찾는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수단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의 문제에 가깝다. 바이오이코노미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주인공이 아니라하더라도, 전환 과정에서 반드시 정교하게 관리되어야할 핵심 변수다. 그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고, 과장 없이 사용하는 것- 그것이 지금 이 논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장 현실적인 태도일 것이다.

    정복영 중앙대학교 기후경제학과 겸임교수.

    저작권자 co2 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탄소중립강좌(6)-환경정책의 ‘그레샴의 법칙’과 DMRV

    탄소중립강좌(6)-환경정책의 ‘그레샴의 법칙’과 DMRV

    ‘디지털측정·보고·검증’으로 대기정책 다시 실효성 회복해야

    ▲각종 대기오염물질을 뿜어내고 있는 굴뚝 이미지.(출처=Pexels)
    ▲각종 대기오염물질을 뿜어내고 있는 굴뚝 이미지.(출처=Pexels)

    겨울이 다가오면 도시는 유난히 잿빛으로 가라앉는다. 미세먼지경보 문자가 울리고, 사람들은 외출 전 습관처럼 마스크를 챙긴다. 깨끗한 공기는 더 이상 당연한 전제가 아니다.

    그만큼 대기오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환경·보건 문제다. 그럼에도 정책의 무게중심은 대기질 관리에서 기후변화 대응으로 옮겨 왔다. 오늘날 공론의 중심에는 탄소중립이 자리한 반면, 미세먼지 문제는 계절마다 되풀이되는 단기 현안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다.

    오늘 강좌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이렇다. 최근 이루어진 정책의 무게중심 이동이 과연 대기오염 문제가 충분히 해결된 결과였는지, 아니면 예산 제약이나 국제 환경 변화 등 외부 요인에 의해 선택된 전환이었는지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대기오염 정책과 기후변화 대응 정책이 현재의 자원 배분 구조 속에서 얼마나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함께 점검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나라는 대기오염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한 뒤 기후정책으로 전환한 국가가 아니다. 여전히 수도권을 중심으로 지역 대기오염은 상존하고, 겨울철 미세먼지는 반복된다. 그럼에도 정책의 무게중심이 기후정책으로 급속하게 이동한 이유는 예산과 행정 역량이라는 자원의 제약 속에서, 국제 협약과 통상 압력, 그리고 장기 국가 전략과 직결된 기후정책이 우선순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문제 해결의 자연스러운 진화라기보다, 제약된 자원 속에서 선택된 전략적 이동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대기정책은 상대적으로 주변화되었다. 각종 오염저감 제도는 기존 법·제도 틀 안에서 관행적으로 유지는 되었지만, 정책의 진화 동력은 약화되었다.

    대기오염 총량제는 총량 설정이 느슨해 실질적인 감축 압력을 만들지 못했고, 배출권거래제 역시 시범적 수준에 머물러 가격 신호가 충분히 작동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기오염 정책에서 성과를 기준으로 정책을 평가하고 조정하는 메커니즘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감축 성과 정량적 검증 못하는 상황서, 정책 집행 책임은 절차와 이행 여부로 이동

    감축 성과를 정량적으로 검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책 집행의 책임은 자연스럽게 결과가 아닌 절차와 이행 여부로 이동했다. 이는 행정적으로 확인이 용이한 장비 설치, 보급 실적이 정책 성과를 대체하는 구조를 낳았다.

    산업단지 관리에서도 이러한 한계는 반복되고 있다. 산업단지는 수십, 수백 개 사업장이 밀집한 하나의 거대한 집합 배출원임에도, 정부의 관리 방식은 여전히 공장별·시설별 방지시설 설치를 지원하는 데 머물러 있다.

    정책 성과는 산업단지 전체의 오염물질 감축이 아니라, 몇 개 사업장이 어떤 설비를 설치했는지로 평가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또한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기 어렵다. 공장별로 개별 방지시설을 도입하는 방식은 중복 투자를 낳고, 단지 전체 차원의 최적 설계나 공동 처리 시스템 구축을 가로막는다. 특히 AI·디지털 기반 통합 관리 시스템은 초기 구축 비용이 크고, 개별 사업장 단위로는 투자 유인이 낮다. 정부 보조금이 단일 설비 설치에 집중될수록, 데이터 통합·플랫폼 구축·디지털 전환과 같은 기반 사업은 계속 뒤로 밀린다.

    결국 개별 공장이 법적 최소 기준만 충족하면 되는 구조에서는 산업단지 전체의 배출을 집단적으로 줄이거나, 탄소중립 로드맵에 맞춰 협력적으로 감축하는 전략이 제도적으로 자리 잡기 어렵다. 성과보다는 설치 실적과 최소 기준 충족 여부를 중심으로 정책이 설계될 경우, 기업의 선택 역시 가장 저렴하고 형식적인 대응으로 수렴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가 반복되면, 효과적인 기술이나 관리 방식은 외면되고 기준만 맞추는 저비용 대안이 시장을 지배하게 되는데, 이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 통화 이론에서 차용한 ‘환경분야의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이다.

    기술 혁신과 정책 진화를 가로막는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개별 제도의 미세 조정이 아니라 정책 평가의 기준 자체를 전환하는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그 전환의 핵심에는 DMRV, 즉 Digital Measurement, Reporting and Verification(디지털측정·보고·검증)가 있다. DMRV는 무엇을 설치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줄였는지를 기준으로 정책을 평가하는 체계다. 국제사회는 이미 기후변화 대응을 넘어, 환경정책 전반을 측정 가능한 성과 중심 구조로 재편하고 있다. 파리협정의 투명성 체계와 EU 배출권거래제는 기후 분야에서 DMRV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킨 대표적 사례이며, 성과를 수치로 검증하지 않으면 제도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 왔다.

    이러한 평가 기준의 전환은 기존 정책 환경에서 주변적 수단으로 취급되던 기술들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게 한다. 설치 여부만으로는 주목받기 어려웠던 기술도 감축 성과가 수치로 검증될 경우 정책적 위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공회전 제한장치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불필요한 공회전을 줄이면 연료 소비가 즉각 감소하고, 그 결과 질소산화물과 미세먼지, 이산화탄소 배출이 동시에 감축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감축 성과가 탄소크레딧이나 연료비 절감, 미세먼지 저감 인센티브 등으로 운전자에게 보상될 경우 정책 효과는 행동 변화로 확장된다. 공회전 감소는 정속 운행과 안정적 운전 습관으로 이어지고, 이는 추가적인 환경 성과와 함께 교통사고 위험 감소, 도로의 안전성 개선이라는 사회적 효과를 동반한다. DMRV 기반의 성과 측정과 보상이 결합될 때, 공회전 제한장치는 환경·기후·안전이라는 서로 다른 정책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복합적 정책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대기오염 문제를 충분히 해결한 뒤 기후정책으로 넘어간 사회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미해결 상태로 남겨진 대기정책을 다시 제자리에 세워야 한다. 그 출발점은 측정하지 않는 정책에서, 측정하고 보상하는 정책으로의 전환이다.

    공회전 제한장치 사례가 보여주듯, 기술은 이미 존재한다. 부족한 것은 성과를 기준으로 정책을 설계하고 보상하는 제도적 틀이다. 환경정책의 그레샴의 법칙을 깨지 못한다면, 어떤 기술도, 어떤 선언도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겨울을 앞둔 지금, 대기정책이 다시 실효성을 회복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DMRV는 선택이 아니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정책의 출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