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강좌(3)- ‘낮게 달린 과일(Low-Hanging Fruit)’의 함정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배출한 온실가스는 기후시스템의 균형을 뒤흔들며, 기후위기를 전 지구적 위험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대응 방식을 재정비했고, 그 전환점이 바로 2015년 파리협정이었다. 여기서 각국이 스스로 감축목표(NDC,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s)를 설정하는 체제로 방향을 틀자, 논의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어떤 경로와 수단으로 줄일 것인가”로 옮겨갔다. 이 과정에서 장기적 감축 경로를 명확히 제시할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해졌고, 이에 부상한 것이 바로 ‘넷제로(Net Zero)’였음은 이미 학습한 바와 같다.

 

그러나 넷제로가 국제적 기준으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드러났다. 실질 감축과 회계적 상쇄가 뒤섞여 목표 달성의 신뢰성이 흔들리는 사례가 나타난 것이다. 겉으로는 탄소중립을 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대기 중 탄소농도 감소로 이어지지 않는 ‘형식적 넷제로’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다.

 

 

탄소중립 4대 전략의 구분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국제사회는 넷제로 논의의 혼선을 정리하고 실질적 감축을 중심에 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결과 감축 경로를 회피(Avoid)–감축(Reduce)–제거(Remove)–상쇄(Offset)의 네 가지 방식으로 구분하는 탄소중립 4대 전략이 제시되었고, 이를 통해 정책적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려는 노력이 본격화되었다.

 

회피(Avoid)는 배출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도록 활동 자체를 바꾸는 전략이다. 즉, “탄소가 생길 일을 처음부터 만들지 않는 것”이다. 출퇴근을 재택근무로 전환하거나, 출장 대신 화상회의로 이동을 대체하는 등 행위 자체를 바꿔 탄소가 발생할 기회를 사전에 차단하는 단계이다.

 

감축(Reduce)은 이미 존재하는 시스템 속에서 배출량을 줄이는 전략이다. 즉,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탄소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공장·건물의 에너지 효율 향상(고효율 보일러 등)이나, 산업 공정 개선 등으로 더 적은 탄소를 배출하도록 만드는 단계이다.

 

제거(Remove)는 이미 배출된 탄소를 없애는 전략이다. 즉, “공기 속에 흩어진 탄소를 다시 회수하는 과정”이다. DAC(Direct Air Capture) 장치로 공기에서 CO₂를 포집하거나, 조림·토양탄소 증진 기술 등이 그 예이다. 대기 중 탄소의 양을 줄여 기후 안정성을 높이는 단계이다.

 

상쇄(Offset)는 어떤 부문에서 줄이기 어려운 배출을 다른 곳의 감축·흡수 활동으로 보완하는 전략이다. 기업이 재생에너지 발전사업 크레딧을 구매하거나 탄소시장에서 감축량을 매입해 잔여배출을 상쇄하는 방식이 여기에 해당한다.

 

낮게 달린 과일(Low-Hanging Fruit)

 

이처럼 4대 전략은 탄소중립의 기본 틀을 세우지만, 현실의 정책 선택 과정은 이론과 다르게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감축 수단 간 비용과 난이도가 차이 나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은 전략 간 우선순위를 경제적 부담을 기준으로 재조정하곤 한다. 이때 등장하는 전형적인 패턴이 바로 ‘낮게 달린 과일(Low-Hanging Fruit)’ 문제다.

 

즉, 각국은 비용이 적게 들고 쉬운 감축부터 먼저 수확하고, 고비용·고난도 부문은 뒤로 미루는 경향을 보인다. 초기에 성과가 빠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축 속도는 정체되고 구조적 전환은 계속 지연된다.

 

이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비판한 이들이 앤서니 팻(Anthony Patt)과 요한 릴리스탐(Johan Lilliestam)이다. 두 학자는 2018년 《Joule》 논문에서, 탄소세와 같은 가격 정책은 초기에는 성과가 나지만 시장은 필연적으로 저비용 감축부터 선택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정작 에너지·산업 시스템의 근본적 전환은 뒤로 밀리고, 장기적으로는 상쇄나 미래기술에 대한 ‘위험한 의존성’이 커지는 구조적 딜레마가 형성된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쉬운 감축이 항상 기후적으로 최선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쉽게 수확할 수 있는 감축에만 매달리는 구조적 편향을 교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NDC의 구조적 문제와 ETS 외 감축대책의 필요성

 

‘낮게 달린 과일(Low-Hanging Fruit)’ 문제는 기후정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한계다. 시장은 필연적으로 쉽고 저비용의 감축부터 선택하며, 상대적으로 어려운 산업 구조전환 등은 뒤로 미루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Patt & Lilliestam이 지적했듯, 현재 가능한 감축은 충분히 하지 않고 미래 기술이 언젠가 제공할 감축을 선반영하는 위험한 정책 패턴을 낳는다.

 

한국의 2030 NDC 역시 이러한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NDC는 수소환원제철, CCUS(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 등 경제성·상용화 가능성이 검증되지 않은 기술에 감축량의 큰 비중을 할당했고, 이는 현재 실현 가능한 실질 감축보다 미래 기술 의존을 중심으로 목표를 구성한 구조적 편향을 드러냈다. 결국 한국이 선택한 경로도 Patt & Lilliestam이 경고한 것처럼, 저비용 감축만 우선하고 고난도 감축을 미래로 미루는 전형적 패턴을 재현한 셈이다.

 

이와 달리 EU는 이러한 문제를 제도적으로 교정하기 위해 비ETS(Emissions Trading System) 부문의 감축을 법적 의무로 규정하는 Effort Sharing Regulation(ESR)을 도입했다. ESR은 감축 비용이 낮은 부문만 선택하는 시장 편향을 차단하고, 수송·건물·농업 등 구조적으로 감축이 어려운 부문에도 국가별 최소 감축 의무를 강제 배정함으로써, 고난도 감축을 미루지 못하도록 만드는 제도적 장치다. 이는 Patt & Lilliestam이 제기한 문제를 실제 정책 설계로 해결한 대표적 국제 사례로 평가된다.

 

한국의 NDC가 보여준 문제 역시 목표 설정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책구조 자체가 쉬운 감축만 선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EU 사례가 던지는 메시지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도 ETS 바깥 부문—특히 수송, 건물, 농업 등—에 대해 법적 감축 의무와 구조적 전환을 요구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않는 한, 동일한 정책 편향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결국 현재 가능한 실질 감축을 지금 확실히 이행하고, 고난도 감축을 미래 기술에 전가하지 않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것이야말로 한국이 현실적인 넷제로 경로로 진입하는 책임 있는 해법이다.